The Collapse Manual Ep.02
2026. 01. 30 - 2026. 03. 17
전시서문
문현정 (독립 큐레이터)
'붕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린다. 흔히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거대한 재난을 상상할 테지만, 붕괴의 감각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다. 기술에 둘러싸인 삶, 달라진 노동의 가치, 효율을 향해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파괴된 자연 속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연속적인 무너짐을 경험한다. 이러한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 속에 서서히 축적되어 온 상태에 가깝다. 불안의 감각은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지금의 우리를 다시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는 <The Collapse Manual >이라는 제목 아래 연쇄적으로 기획된 두 번째 전시다. 직역하면 '붕괴 사용 설명서'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종말이 아닌 붕괴 그 이후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앞선 전시가 붕괴 이후의 풍경을 그려냈다면, 이번 전시는 무너진 자리에서 새롭게 파생될 수 있는 존재들을 상상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붕괴 위에서도 예상치 못한 생명력과 변화는 포착된다. 그리고 그 폐허 이후에 자리 잡을 것들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질 세대의 가능성이 겹쳐진다.
우리가 고장 났다고 느끼는 시스템은 좀처럼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형태를 바꾸며 다른 방식으로 작동을 이어간다. 이전의 것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면서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은, 어쩌면 유전과도 닮아 있다. 이러한 흐름은 종을 넘어 문화와 역사, 문명 전반에 걸쳐 반복되고, 필연적인 변이를 발생시킨다. 예견된 종말처럼 보이는 순간은 다른 조건 위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장면일 수 있다. 전시는 우리가 아직 목격하지 못한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미세한 변화의 징후들을 따라가며, 붕괴 이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겹쳐지며 생명체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그것이 미래의 어떤 존재일 것이라 상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상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 보다, 과거로부터 전해진 이미지와 형태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배열하고 연결하는 방식과 관계된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호출하고 겹쳐 놓으며, 그 사이에서 아직 정립되지 않은 이미지의 질서를 조직한다. 여기서 붕괴는 단절과 상실이 아닌, 이미지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의미를 획득하게 만드는 잠재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반복될 붕괴의 조건 속에서 다음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은 우리가 지나쳐온 현상을 붙잡아 다른 시간대 위에 놓음으로써,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다시 감각하게 만들 것이다.
김대욱의 작업은 거대한 꽃을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인간의 피부를 닮은 표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모두가 돌연변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해, 변형된 꽃 시리즈를 통해 자연에서 발생하는 변이와 비정상적 현상을 탐구해왔다. 의인화된 꽃의 현상은 자연의 변이를 통해 인간이 부여해온 가치 판단과 혼종성, 다양성의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박웅규는 한국과 일본의 고전 불화에서 발견되는 조형성을 바탕으로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그린다. 그는 동양화의 화육법을 참고해 의태, 구도, 형태, 질감, 변형, 활용이라는 여섯 가지 방식을 중심으로 동양화의 형식을 실험해왔다. 나방이나 지네 같은 벌레와 괴생명체, 혹은 십우도(十牛圖)를 떠올리게 하는 소의 내장과 한자를 결합하는 방식은 '부정성'이라는 모호한 감각과 감정을 탐구하게 만든다.
신미경은 박물관의 유물과 동서양의 문화적 오브제를 비누라는 물질로 옮겨오며 번역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업에는 서양의 고전 조각이나 동양의 도자기와 같은 대표적인 유물의 도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세계 각국을 넘나들며 전시되는 그의 비누 조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물질적 상태와 외형을 변모해왔다.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는 작업은 끊임없이 ‘되어가는’ 상태에 놓여있다.
안재홍은 신체의 감각이 닿는 주변의 물질과 환경을 회화로 탐구한다. 그의 작업은 일상의 가까운 시점과 먼 시점을 오가며, 신체의 흔적과 내면의 욕망, 꿈의 이미지를 형상으로 조직한다. 고요해 보이는 화면에는 미세한 균열과 불안이 스며 있는데, 이는 단단해 보이던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암시한다. 그의 회화는 충돌과 고립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현실과 환영이 공존하는 지점에서 인간 내면의 긴장을 드러낸다.
오묘초는 자연의 형상과 신경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집필한 공상과학적 소설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조각과 설치 작업을 이어왔다. 유리를 주된 매질로 하는 그의 조각은 마치 신경 세포의 연결망을 연상시키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지성체를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기억의 전이를 주된 주제로 삼는 그의 작업은, 타자의 이야기를 대리로 감각하고 편집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된다.
윤미류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물성과 서사를 회화로 시각화한다. 작업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하지만, 피사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특정 상황에서 포착된 단편적인 순간의 인상과 질감을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연출된 장면은 여러 개의 화면으로 나열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대상을 경험하며 느끼는 정서를 환기하며 사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이용빈은 금속과 가죽, 라텍스 등의 재료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낯선 형상을 만든다. 디지털 게임이나 SF, 판타지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들은, 가상과 허구에서 출발하지만 분명 전시장 위를 물질로 딛고 서있다. 선으로 만들어진 골조 위에는 서로 다른 질감의 피부가 씌워진다. 뼈대와 표피, 내부의 공허함 사이에서. 납작한 피부를 가진 작업은 스크린을 벗어나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