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lapse Manual
2025. 11. 21 - 2025. 01. 07
전시서문
문현정 (독립 큐레이터)
하루가 그 어느 때보다 짧다. 시간이 흐르는 찰나를 느낄 겨를도 없이 작업과 대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떠오른 클라우드 알림이 이미 지나간 기억을 불러낸다. 그러나 그 기억은 낯설다. 역사는 시간을 선형적으로 배열하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체감되는 시간은 늘 분절되어 있다. 끝없이 늘어나는 기억은 머리가 아닌 시스템에 보존된다. 데이터의 형태로만 되살아나는 과거가 더 익숙한 이유다. 전쟁과 재난의 이미지들이 실시간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피부 위에 닿는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소비되는 스펙터클 속에서, 삶의 사소한 붕괴는 언제나 진행 중이다.
현대 기술의 발전이나 매체 환경의 변화만으로 붕괴를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인이 느끼는 이러한 정서는 근대 이후 문명이 구축해 온 진보와 효율, 합리성과 통제의 언어에 깊이 스며 있다. 산업화는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듯 보였지만, 일의 가치와 행위의 의미는 점차 데이터화되고, 노동 주체로서의 인간은 시스템의 한 축으로 통합되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의 단위로 환원하고, 통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의 유대는 약화된다. 생태계의 복잡한 관계망 역시 생산성의 논리로 치환되었다. 빠른 속도감과 과잉 속에서 우리는 균열을 감지하지만, 그것을 실존의 문제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이미 붕괴는 삶에 내재한, 상시적인 감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붕괴는 일상에 조용히 침투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근래의 경향이 아니다. ‘디스토피아’로 대표되는 장르 문화가 보여주듯, 과거의 우리는 현대 사회가 내포한 문제와 불안을 언제나 먼 미래의 시점으로 투사하며 유기해 왔다. 매번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그 패턴과 속도 안에서 미래를 상상한다. 애도와 우울, 해방의 과정은 반복되며, 종말론적인 정서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귀환한다. 그 회고적인 순환 속에 모든 것은 다시 정렬되고, 세탁되며, 분해 불가능한 딜레마가 되어 궤도를 떠돈다. 과거의 잔여들은 언제나 부활한다. 사라짐은 늘 불완전하다. 다만 반복되는 붕괴 속에서, 우리가 재구성할 것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전시 《The Collapse Manual》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 그 이후를 상상한다. 직역하자면 ‘붕괴 사용 설명서’와도 가까운 이 제목을 되뇌며 우리는 지금의 것을 상실한 미래를 떠올리지만, 전시는 어떠한 예언이 아닌 ‘그 이후’의 시간을 적어 나간다. 무너진 과거를 재건하기보다, 반복될 미래의 붕괴 속에서 남겨진 것들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그 목표다. 두 차례로 구성된 전시에서 작가들은 각자의 언어로 ‘붕괴’를 사유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어떠한 지침이라기보다,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번역해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인간중심주의, 생산성 그리고 계몽적 이성이 만들어낸 세계 아래에서. 문제의 기원을 찾고, 잃어버린 감각을 복원한다. ‘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예정된 종말 안에서.
강철규는 자전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회화를 선보인다. 개인의 경험과 사유에서 출발한 도상들은 검은 구, 반인반수의 형상 등으로 변주된다. 작가는 여러 화폭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과정을 문학에서의 ‘투사’ 개념에 빗대어 설명한다. 위기와 불안, 그리고 승화를 주된 심상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마주한 실존적인 물음을 가시화한다.
인간과 기술, 자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구기정은, 자연의 풍경을 3D 렌더링 기반의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화면 속에서 풍경은 실재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작가는 오늘날의 매체와 인간이 경험하는 감각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는 ‘자연’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안도현은 소비사회의 생산 시스템에서 낙오되거나 방치된 사물을 수집하고 재조합한다. 산업 공정의 부산물을 활용해 대상을 수집하고 탐색해, 원래의 기원과 서사를 알 수 없는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조각과 설치, 퍼포먼스로 구현되는 그의 작업은 이러한 변화를 함축하며,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보여준다.
양승원은 사진이라는 매체에서 출발해 그 불완전성과 인간 인식의 균열을 탐구한다. 자연과 장소를 재현하는 풍경 사진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최근 작업에는 ‘물’이라는 구체적인 매질이 등장한다. 사진을 기억의 장소로 바라보는 그의 작업에서 물은 흔적이 머무는 곳이 된다. 납작한 평면을 벗어나 입체로 확장된 사진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유동성을 드러낸다.
이영욱은 회화에서 ‘반복’이라는 형식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실험하며, 형상을 해체하고 재조합, 나열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대상과 신체의 이미지는 극사실적으로 재현되는 동시에 기묘하게 분절되고 중첩된다. 나열된 형상은 컴퓨터 그래픽이나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무수한 이미지의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공허를 반추하게 한다.
이현우는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물의 외형에 주목한다. 사물이 나아갈 방향을 잃은 상황에서, 그 통념적 가치는 더 이상 유지될 이유를 잃는다. 작가는 이러한 성질을 개인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과 연결 지으며,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대상이 존재할 방법을 모색하는 조각을 만들어 나간다.
회화와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조무현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표면과 내면의 관계성을 탐구해 왔다.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이미지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대상의 외면과 그 내면을 연결하며 그사이에 존재하는 사이 공간을 탐색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맹목적인 믿음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을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